마태복음 5:21-26 우리를 고발하는 자

마태복음 5:21-26 우리를 고발하는 자 유대인들은 그들이 @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출 19:8; 요 5:39). 주님은 십계명을 예로 들어 성경(마태복음 15:8-9, 사람의 계명)에 대한 이러한 관점의 문제를 설명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는 살인을 금하는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이 계명을 지킵니다.

즉, 실제로 살인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킨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분노를 살인과 동일시하셨습니다(창세기 4:5-8 언제 살인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형제에게 “라가”(바보)라고 말하면 지옥 불에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의 분노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자존감 손상)의 중심은 ‘나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분노는 없습니다.

이 주의 말씀은 율법은 지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죄인임을 나타내려 하심이라(롬 3:19-20). 사람들이 율법을 순종의 관점에서 보는 한 의인(믿음의 행위를 행하는 자)과 죄인(믿음의 행위를 행하지 않는 자)으로 나뉘게 마련입니다(눅 18:9).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이 왜곡된 견해를 바로 잡으셨습니다(17절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 죄인은 v 앞에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피로 길을 닦았습니다.

이 길은 율법으로 정죄된 죄인들에게만 보인다(참조, 요일 1:2 및 교제의 전제). 행위의 렌즈로 율법을 보는 사람은 이 은혜의 수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팔복을 통해 구원의 비밀을 설명하셨습니다.

2. 23-26절 / (고발자)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원망하는 것이 생각나거든 5:24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푼도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가지 말라 예배는 생명이며 긍휼(용서)을 경험한 자는 은혜에 감사하여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예배의 본질은 감사입니다(시 50:23, 눅 7:47 → 살전 5:18). 감사의 도구는 율법입니다(롬 5:20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러나 인간은 숭배를 종교 의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일 아침에 모이는 표준화된 종교 의식(찬송, 기도, 성찬, 설교, 헌금, 교제)은 @접수된 예배로 간주됩니다.

물론 이런 형태도 예배에 포함된다.

형태는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언제나 형태에 의해 삼켜진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었고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갈 1:6 빨리 가라, 계 2:4). 우리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형식으로 축소될 뿐입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함께 모여(히 10:25) 이스라엘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사업 계획에 대해 배웁니다(행 2:42, 롬 1:10-12, 행 20:7). 이를 통해 @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공급됩니다(롬 11:17, 요 15:5-7). 이 은혜 안에서 우리는 감사와 예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자의 삶에는 ‘은혜를 받는 것’과 ‘은혜를 나누는 것’의 두 주기가 작동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요소 중 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예를 제시하셨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죄를 범한 일이 생각나거든 모이기를 멈추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24절). 이것을 무시하면 고발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재판관에게 넘길 것이 두렵고 재판관은 당신을 감옥에 넘겨주고 독방에 가둘 것입니다(최종심판). 25절의 “고발자”는 누구이며 그가 넘겨준 “판사”는 누구입니까? 우리를 고발하는 것은 ‘율법’입니다(롬 7:7-9, 요 5:45). 율법은 우리를 기소하고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겼습니다.

판사는 정의의 기준입니다.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신자들의 평안한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법은 따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법을 통해 쌓아온 자기 의를 가지고 @ 앞에 서려고 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율법관(성경관)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그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23-26절 말씀은 20절과 17절로 연결됩니다.

예배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아는 삶, 율법의 고발을 받는 삶, @판단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자신을 두는 삶, 자신의 삶을 @뜻에 맡기는 삶입니다.

예배는 거래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를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는 율법을 반포한 “@”의 뜻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은 “영은 영이니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을 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섬기는 것입니다(요 6:63). 성령의 감화로 우리의 눈이 열려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정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와 의와 심판을 볼 수 있도록 영의 형태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요 16:8). 이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입니다.

예배는 마음으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눈을 뜨는 것, 감사합니다 @恩恩的生活.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인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정죄를 받았고 죄인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긍휼을 구하는 역사도 소멸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예배는 우상숭배로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예배보다 앞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즉 율법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법은 우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율법과 화목하지 아니하면 율법을 지키며 믿음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제 율법에 대한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유대인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나 율법을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만 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영적 실재입니다.

원고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보셨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Doomsday는 모든 인류가 원고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날은 원고의 진상이 밝혀진 날이었다.

자기를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고발하는 자와 화목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그 날은 전에 없던 재앙의 날이 되리라. 주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전혀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의 실제는 말세(노아의 방주)에 나타난다.

주의 말씀은 육신에 얽매이고 이생에 미혹된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히 3:10).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의 말을 오늘날 세상에 유익한 말로 바꾸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땅의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의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구원은 @에 속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택한 계약 백성만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redemption에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의 구원을 알면서 @이 계획한 @의 왕국을 보게 하소서. 그 나라를 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와 나그네로 살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실체가 드러날 @의 나라를 고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원고와 화해하셨나요? (고린도후서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