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별이 정휘인] 초침을 깨물다.

 

초침을 깨물다.

W . LSJA 계속 한밤중이면 좋을 텐데. 시간은 애처롭게도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기약 없는 약속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고,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탁한 계단을 쉼 없이 내달렸을 땐 이미 달이 지고 있었다.

부서진 유리창이 반짝 빛나며 어둠 속에 달빛을 비췄다.

욱신거리는 발목으로 달빛을 피해 달렸다.

꽉 맞잡은 손은 무척이나 떨려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게 했다.

“ 뛰어 !
” 달이 꺾여, 차가운 학교에 하얀 빛을 내렸다.

안돼. 안돼. 검은 운동화에 힘이 들어갔다.

달이 쫓아오고 있어. 어서. 뛰어.  엄청나게 큰 달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힘이 빠지면, 다리를 삐끗해 넘어지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주저앉으면, 그때 우리를 삼키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어.“ 여기라면 괜찮을 거야. ” 달리는 별의 뒤로부터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은 구석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서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비껴가는 달빛에 후- 하고 숨을 내쉬는 별이었다.

휘인은 그런 별의 앞에 서서, 혹여나 빛이 움직일까, 방패가 되어 있었다.

별은 꾹 쥐고 있던 긴 삽을 스르르 놓았다.

“ 곧 아침이야. ”“ 응. ”“ 커튼을 친다고 해도 무리일 거야. ”“ 응. ” 별은 그저 묵묵히 대답했다.

휘인은 답답한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온 걸까. 어째서 이런 세상과 조우하게 된 걸까. 휘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는 별의 차가운 숨결이 휘인의 노란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 분명… 그저 야자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 휘인은 그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별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떨리는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 어째서… 어째서…. ” 휘인의 떨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맺혔다.

별은 천천히 손을 올려 휘인의 노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분명 우리는 야자를 하고 있었다.

그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휘인이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자, 환하게 내리는 달빛 아래, 서로를 물어뜯으며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경직된 휘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창밖에 있는 것들과 같이 온몸에 피가 묻은 경비원이 자고 있는 별의 팔 언저리를 향해 끈적하고 날카로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휘인이 재빠르게 옆에 놓여있던 빗자루를 들어 내리치지만, 경비원은 이미 별의 팔을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 … 달이 움직이고 있어. 우리도 움직여야 해. ” 쓰러진 경비원을 비추고 있던 달빛이 사라지자, 경비원의 일그러진 몸과 묻은 피는 전부 사라지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별이 피가 흐르는 팔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쳐 달빛에 닿자, 썩어가기 시작하는 피부가 드러났다.

“ 응. ” 고개를 파묻고 있던 휘인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서 있는 별의 손을 꼭 잡고 다시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이렇다.

휘인이 공부에 집중하고, 별이 잠에 빠져 있을 때, 어떠한 이유로 세상에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저 세상이 일그러진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열배 이상 커져 버린 하얀 달과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경찰이나 군대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어쩌면 그저 하나의 바이러스가 퍼진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 변해버린 사람들은, 빛 아래에서만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손전등이나 형광등이 아닌, 오로지 자연의 빛. 햇빛과 달빛. 빛을 맞은 사람들은 이성도, 사고하는 능력도, 기억도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사람을 먹고 싶어 하는, 마치 좀비 같은 모습만이 남을 뿐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빛 아래에서 사라진다.

다시 빛에서 벗어났을 땐, 그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 이상한 세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 1층은 안전할 거야 !
” 나란히 달리던 휘인이 그렇게 소리쳤다.

별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 전, 물린 별을 두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온 휘인은, ‘ 아무래도 다들 물린 것 같아. ’ 라며 전파가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쩌면 우리 외에도 다른 생존자가 있을 것만 같아서, 휘인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기괴하고 이상해진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는 건 무엇보다 두렵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휘인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아닐까.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별은 그 생존자를 자신이 어떻게 해버릴 것만 같아 웃을 수 없었다.

‘ 그만해. 그만. 여기에 나를 두고 가. ’ 빛의 뒤에 서서 별이 그렇게 말했다.

별은 단념한 듯, 특유의 진지한 얼굴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휘인은 그런 별에,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절대 두고 가지 않을 거야. ’ 그 대신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별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일 땐, 망설임 없이 목을 쳐 죽이라는 약속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기이해져 버린 세상 속에서 맺었다.

“ 창문이 없는 곳이 어디였지 ? ”“ … 창문이 없는 곳은 아니지만, 보건실이라면 분명 커튼이 쳐져 있을 거야. ” 둘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흩어진 창문의 틈으로 하얀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남색의 복도 속에서 별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흩날려 울렁이는 향기를 뿜어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낡은 보건실의 팻말이 우리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그렇게 안심한 둘의 앞에,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이하고 불쾌한 소리가 나타났다.

  묵직한 저음으로 소리치는 것 같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듣기 싫은 소리.  달리는 것을 멈추고, 별은 기다란 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저거…. ”“ 응. ” 별은 모든 걸 안다는 듯 담담히 대답하고선 긴 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 앞 달빛이 비치는 곳에,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한쪽 팔은 잘려나간 건지 지저분하게 끊어져 있었다.

그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검붉은 피가 뒤로 죽 늘어졌다.

별은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휘인을 자신의 뒤로 밀었다.

  별은 지금 달빛 아래로 나아갈 수 없다.

저 앞에 느린 속도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적막한 학교의 공허한 소리만이 감돌았다.

저음의 남자가 공기를 뱉어내는 듯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고, 찝찝하게 질척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것과의 거리는 이제 대략 3미터 정도. 별은 불끈 힘을 준 하얀 팔로 그를 향해 힘껏 삽을 내리쳤다.

푹- 하는 진득한 소리와 함께 목의 절반 정도가 끊어져 나갔다.

새카만 피가 울컥거리며 목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별은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삽을 내리찍어 그의 찐득한 목을 마저 날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머리는 데굴데굴 굴러 그늘 속에서 멈췄다.

그 순간 머리는 평범한 얼굴을 한 남자아이의 얼굴로 변했다.

“ 허억… 허억…. ” 휘인이 숨을 고르는 별의 축축한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별은 파르르 떨리는 목으로 침을 한 번 삼키고선 끈적이는 피가 묻은 삽을 질질 끌고 빛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보건실 앞에 도착한 별은 망설임 없이 삽으로 유리창을 깨트렸다.

별이 가볍게 넘어가 하얀 보건실의 문을 열어주자, 휘인이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문을 잠그고 모든 유리창에 검은 커튼을 전부 치자, 새카만 암흑이 세상을 덮었다.

별과 휘인은 서로를 더듬어 바닥에 조심스레 앉았다.

  빛이 사라지자, 습한 피의 냄새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휘인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별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워서 저절로 눈물이 맺힐 것만 같았다.

“ 상처, 아파 ? ”“ 아니. 아무런 감각이 없어. ” 별은 그렇게 대답하며 어둠 속에서 자신의 팔을 더듬었다.

이상한 감촉의 물렁이는 것이 만져지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아프지 않았던가. 분명 물렸던 순간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른 것 같은데. 별은 상처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암흑 속에서 또 다른 암흑이 덮였다.

어째서 배가 고프지 않을까. 교실에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출출함에 배를 쓰다듬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뒤죽박죽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아팠던가 ? 정말 물렸던가 ? 확실했던 기억이 모호해지며 머리를 헤집었다.

여긴 어디였지 ? 나는 왜 이러고 있지 ? 나는 누구인 거야 ?  허억- 별은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암흑 속. 대체 여긴 어디인 거야. 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더듬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알아챈 건지 휘인도 따라 일어서서 커튼을 살짝 젖혀 빛을 들여보냈다.

아슬아슬하게 빛을 피한 별이 숨을 고르며 휘인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모든 기억이 안정을 찾은 듯, 별은 울렁이는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미안해. ” 휘인은 바닥에 앉아 있는 별에게 다가가 꽉 안았다.

두 눈을 꼭 감고 별의 귓등에 사과를 남긴 휘인은 여린 손으로 별의 물결 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별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휘인의 따뜻한 등을 토닥였다.

“ 따뜻해. ”“ 응. ”“ 오래전 일이 기억나지 않아. ”“ 응. ”“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 … 응. ” 휘인은 일렁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며 연신 별의 몸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온기에 별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 수 있도록. 남은 기억만이라도 따뜻했다고 회상할 수 있도록.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이 자신을 꼭 안아준 그 감촉을 평생 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그 염원을 담아 입을 맞췄다.

  차갑고 건조한 별의 얇은 입술이, 휘인의 따뜻한 입술로 녹아들었다.

흐르는 눈물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채로, 둘은 은은한 빛 속에서 따뜻해지고 있었다.

  사실 휘인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누구보다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별이 자신이 살던 동네로 이사 왔을 때부터, 다시 멀리 떠났다가 중학교에 올라와 다시 만났을 때에도, 마음이라도 통했는지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같은 반에 짝꿍까지 되었을 때도, 휘인은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쑥스럽게 말할 때, 별이 말하는 키가 작고 염색한 머리카락의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도, 부모님과 싸워 집에서 뛰쳐나왔다는 걸 듣고 바로 달려온 별의 걱정하는 표정도, 좋아한다며 고백하는 여자아이들을 전부 돌려보내며 휘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환하게 웃었던 것도, 전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휘인은 친구로 지냈다.

별이 고백하기를 기다린 걸까. 아니면 두려웠던 걸까. 그때의 기분과 감정은, 지금은 기억나지 않았다.

맞닿아가는 혀 때문일까. 모든 기억이 몽롱히 저 커다란 달빛 속으로 스며 들어가는 듯했다.

마치 달이 우리의 기억을 집어삼키듯. 우리도 서로에게 옮아가고 있었다.

“ … 좋아해. ”“ … 응. ”“ 좋아해…. 좋아했어. 많이… 많이 좋아했어…. ”“ 응…. 알고 있어. ” 휘인은 포근하게 웃으며 별을 더 꽉 끌어안았다.

별도 휘인을 꽉 껴안은 채로 축축이 휘인의 어깨를 적셔가고 있었다.

“ 미안해…. ”‘ 치직… 여기는… 알파 03…. 지직… 생존자는… ……로 집결 바란다…. ’‘ 지직… 다시 한번 말한다…. 생존자는… 치직… ……로 와주길 바란다…. ’ 벌떡. 라디오 소리에 눈을 뜬 휘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뿌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잠이 든 건지 새벽의 빛이 창문 사이로 연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휘인은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손가락을 별의 코언저리에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가, 잔잔한 숨결이 느껴져 안심하며 책상 위에 올려진 라디오로 다가갔다.

  하늘은 어두운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반쯤 사라진 달이 흐릿하게 저 멀리서 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인은 커튼을 조금 더 친 후, 별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있잖아 나…. ”  뒤척이는 소리에 휘인은 조심스레 운을 떼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별을 바라보았다.

별은 잠에서 깬 건지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눈꺼풀을 살며시 올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공허한 눈동자가 휘인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 자그만 눈동자는 부자연스럽게 움직여 휘인과 마주했고, 싱긋 웃어 보이는 휘인의 미소에 파르르 떨리며 모습을 감췄다.

“ 잘 잤어 ? ”“ … 응. ” 별은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아직 앉아 있는 휘인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가야지. ” 휘인은 머뭇거리며 입을 벙긋대지만 이내 꾹 다물고 일어나 교복 치마를 툴툴 털었다.

  문을 열고 나온 복도의 냄새는 이상했다.

텁텁하고 건조한. 세상에 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냄새였다.

별은 피가 굳은 삽을 들고 복도로 나와 벽에 착 붙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에 죽인 시체의 흔적 외에 변한 건 없었다.

낯선 냄새의 복도를 지나, 서서히 아침의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별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을 끄는 삽의 쇳소리가 귀를 긁었다.

그 뒤에서 휘인은 미처 별에게 팔을 뻗지 못한 채로 주먹을 꾹 쥐고 있을 뿐이었다.

“ 왜… 왜…. ” 휘인은 그렇게 물으며 간신히 별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햇빛 뒤에 선 별은 휘인의 손길에 우뚝 멈춰 섰다.

“ 나가야지. ” 휘인을 향해 일그러진 얼굴로 돌아본 별이 말했다.

물결 진 보랏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제자리를 찾아가자 어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휘인은 그 모습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아 마른침을 삼키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 아니야…. ” 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가지 않을 거야. 너를 두고 절대 나가지 않을 거야. 휘인은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눈 밑이 요동치며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별은 그런 휘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뻣뻣해진 자신의 손을 뻗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휘인의 손을 꼭 잡았다.

“ 가 줘. ”“ … ”“ 가 줘. 멀리, 아주 멀리 가서 나를 기억해 줘.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마. ” 연신 고개를 젓는 휘인의 뺨을 쓰다듬으며 별은 새는 발음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쾅- 하는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 학교가 점점 무너지고 있는 걸까. “ … 별아 뒤에 !
” 휘인이 소리치자, 별이 삽을 꽉 쥔 채로 휙 뒤돌아 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피범벅의 무언가를 내리찍었다.

가슴팍을 아무리 찔러도 움직임이 멈추지 않자, 별은 양손을 높게 들어 삽을 푹 내리찍었다.

잠잠해진 시체에 별은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다시 돌지만, 땀이 전혀 안 묻은 걸 알아채고 어색하게 웃었다.

별은 아슬아슬한 그늘에 서서 손에 묻은 피를 교복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휘인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가. ”“ … 싫어. ”“ 어차피 나는 나갈 수 없어. 나가는 순간 너를 물어버릴 거야. 그늘만 찾아서 걷는 것도 무리가 있고. ” 휘인은 울음을 머금은 채로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분명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이별이 올 것이라는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나고 슬픈 거야.  휘인은 주먹을 꽉 쥐고 파르르 떨었다.

부정하고 싶은 화나는 이 세계가 그냥 전부 멸망해 버렸으면. 이딴 세상 따위, 존재해봤자 분노만 솟아오르니까.  길고 질척한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있다.

갈라지는 기이한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다.

또다시 위층에서 굉음이 일고,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결국, 나가야만 하니까.“ 뛰어 정휘인 !
!
!
” 별의 외침과 동시에 휘인은 투명한 유리 문을 박차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빛에 모래가 반사되어 하얗게 눈을 찔렀다.

땅을 딛고 달리는 발의 감각이 퍽퍽하다.

건조한 모래가 신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곧 그늘이다.

그늘에 도착하면, 일단 멈춰 서서, 라디오에서 안내한 곳으로 달릴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아주 잠깐만, 아주 잠시만 뒤를 돌아볼 것이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돌아볼 것이다.

“ 허억… 허억…. ” 휘인은 그늘진 차에 몸을 기대고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작아진 유리문 안으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삽으로 싸우는 걸 포기한 듯, 삽을 던져버리고선 햇빛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나를 지키려고 저렇게 까지 하는 거야.  별이 유리 문으로 나가려는 팔이 없는 시체를 잡아채 물어뜯었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휘인을 지키려는 듯이. 그 무엇도 유리문 너머로 지나가지 못하도록, 몸을 던져 막고 있었다.

“ … 문별이…. ” 휘인은 그 모습을 보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등으로 눈물을 비벼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달리기 시작했다.

별을 위해서라도, 휘인은 살아야 했다.

저 아이의 삶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휘인은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다.

앞으로. 계속. 저 빛나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검은 피에 묻혀 사라지지 않도록. 휘인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달렸다.

그 눈물이 땅에 떨어져 메마르도록.“ 두 팀으로 나눠서 수색해. 음식이나 옷이 있으면 무조건 챙겨오고. 알았지 ? 출발 !
” 딱딱한 방어용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두 줄로 나뉘어 출발했다.

손에는 무기와 가방을 들고 약국과 식당 병원을 뒤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 휘인 씨 !
전에 여기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 ”“ 네. 2년 전 ……사태가 터졌을 때 이곳에 있었습니다.

” 휘인은 하얀 가운을 입은 채로 걸었다.

2년 만에 와본 곳은 여전히 공허하고, 메마르고, 아팠다.

휘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어쩌면 무의식으로, 2년 전 그 텁텁한 모래를 다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그 당시 달렸던 발자국이 길을 안내하듯 아직도 죽 이어져 있었다.

몸을 숙여 그 자국을 손으로 조심스레 훑어봤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손가락을 타고 스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변한 거라곤, 나뿐이야. 휘인은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눈동자로 새빨간 손자국이 끈적하게 나 있는 유리 문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되돌아갔다.

그때 그날로. 별이 온몸을 던져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 …!
” 붉게 번진 유리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보라색의 머리카락. 휘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 널브러진 머리카락은 피와 섞여 검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가 덕지덕지 붙은 시신은 여러 구의 다른 시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사후경직이라고 하던가. 별은 시체들의 피부와 옷깃을 꽉 잡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별은 2년이 지나 휘인이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 이들을 놓지 않고 있었다.

휘인이 바깥세상으로 달려나간 그 문을 지키려고 온몸을 바친 별의 모습이 눈앞에 아련히 떠올라, 휘인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백신도 개발되었고, 딱딱한 전용 방어복도 보급되었다.

햇빛과 달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집도 생겨났고, 물린 이들끼리 지내는 마을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렇게 변해버린 세상 안에서, 왜 문별이 너만큼은, 너만큼은 그때 그대로인 거니. 휘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서 풍기는 쌉싸름한 약의 냄새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여전히 이곳에서, 나는 다가오는 미래를 마주하는 과거 속에서, 닿지 못하고 서로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겠지. ‘ 대학교 어디 갈 거야 ? ’‘ 너 가는 곳으로. ’‘ 너 성적으론 못 가. ’‘ 죽을래. ’ 그럼 나랑 오늘부터 공부하자.  봄의 끝. 매일 남아서 공부하는 휘인의 뒷자리에서 그 노란 단발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도 알아. 내 성적으로 네가 가는 대학교는 절대 못 간다는걸. 별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 난 약사가 될 거야. ’‘ 안 어울리는데. ’‘ 야 씨- ’ 사실 죽어라 공부하긴 했었다.

시험 기간에는 너의 뒷자리에서 열심히 문제를 풀어도 보고, 집에 돌아가서도 잠을 포기하고 영어 한 문장이라도 더 봤다.

그렇게 피곤한 상태로 학교에 가서 너를 보면, 전날 쌓인 피로가 전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늘 눈 밑이 까맣게 변해 오는 내게, 너는 밤새 게임이라도 하냐고 놀렸고, 나는 반박하지 않고 그저 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몰래 공부해서 너와 같은 대학을 가려는 나의 자그만 속셈이었으니까. ‘ 문별이 – !
!
!
’ 그리고 엄청난 고통.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팔의 살점이 뜯겨나간 뒤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흐르는 피를 막아 보지만, 온몸으로 퍼지는 이상한 기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 잠시 잠들었을 뿐인데. 잠시 머리를 기대고 있으려다가 잠든 것뿐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시야가 확대되었을 땐, 하얀 달빛에 몸이 변해가고 있었다.

하얀 피부 속으로 초록색 혈관이 팽창하고 있었고, 뻣뻣한 감각이 몸을 뒤덮어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죽는 걸까.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빛이 사라지고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사실 널 보내는 게 엄청나게 두려웠는데. 혼자 이런 곳에 남겨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워서 덜덜 떨렸는데. 앞으로 달려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죽어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들을 네게 보내면 안 되겠다는 신념이 들었다.

  그래서 막았다.

온몸을 던져 막았다.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뛰어갈 수 있도록. 그리고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하도록. 몸을 던져 너를 지켰다.

“ 휘인 씨 ? ” 아, 네.  휘인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가운을 툴툴 털고 보건실을 향해 걸었다.

우리가 그 밤을 보낸 곳으로. 그날 우리가 마음을 나눴던 곳으로. 휘인은 다시 되짚어가고 있다.

하나씩, 조금씩.  평생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너를 잊지 못할 거야. 그 당시의 두려웠던 감정도. 설레었던 감정도. 너를 믿었던 감정도. 모두 기억할 거야.  그렇게 너를 추억할 거야.  이상하게 변해버린 이 세상 속에서 하염없이 너를 추억하다, 네가 있는 곳으로 나아갈 거야.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너는 나를 지키고, 나는 너를 평생 기억하기로. “ … 이 시신, 그늘로 옮겨주세요. ”“ 아시는 분인가요 ? 이미 형체도 없는데…. ”“ … 옮겨주세요. ” 그늘로 옮겨져 반드시 누운 별을 한번 내려다보며, 휘인은 빨간 유리 문을 열고 나갔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다시 그 퍽퍽한 모래만을 걸을 뿐이다.

이 세상은 변했으니까. 너에 의해, 너를 위해, 나는 걸어 나가니까.-네 가지 엔딩이 존재합니다.

“ 무기 들어 !
” 전방에 한 놈이다.

  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휘인은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팀원들을 헤치고 나가, 눈부시게 빛나는 모래 위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피범벅의 시체 한 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덜컥, 하고 숨이 막혔다.

햇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나는 보라색 머리카락. 익숙한 하얀 교복 셔츠에 회색 바지. 기다란 다리를 절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문별이 네가, 나를 향해서.  안돼. 안돼.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허공에 뻗어 건조하게 부서지는 네 이름을 입에 담아 외쳐 보지만,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이 너의 이마를 적중해 쓰러진다.

“ 문별이 – !
!
!
” 휘인이 건조한 모래를 딛고 달려나갔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빛나는 모래 한복판에서 쓰러진 별을 끌어안고 그저 엉엉 울 뿐이었다.

– 위와 똑같은 상황.  별을 발견한 휘인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앞을 가로막고 선다.

팀원들은 휘인을 공격하지 않지만, 뒤에서 다가온 별이 휘인을 물어 감염. 고통에 쓰러지는 휘인과, 별 모두 사살하는 팀원들.  위와 똑같은 상황. 별을 발견한 휘인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별을 끌어안아 팀원들이 공격하지 못하게 한다.

잠시 멍하니 있던 별이, 휘인의 목덜미를 물고 팀원들이 휘인의 등에 화살을 쏴 둘 다 사살.   네 오랜만에 마마무 팬픽이네요.이 글 쓰는 데 2주 정도 걸린 것 같은데.맨날 여자친구 팬픽만 올리지 말고 마마무도 올려야지 하다가 쓰게 된 건데조금 쓰다가 그만두고 쓰다가 그만두고를 반복하며 몇 주나 걸렸습니다.

사실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세계가 멸망한 뒤의 스토리) 로 써보고 싶은 게 많아서 지금 쓰고 있는 멸망 장르만 몇 개가 돼요.이런 기이하고 묘한 세계의 장르를 좋아합니다.

색감 없는 회색의 학교 속에서 밤을 달리다.

라는 구성으로 시작해서 좀비로 끝이 났네요엄청나게 커져버린 달. 사실 지구보다 커진 달로 하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일 것 같아 줄였습니다.

엄청나게 커진 회색의 달이 새카만 하늘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공허함, 그 기이함.  진짜 회색 그 자채로. 커다란 구멍도 보이고. 그런 달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공포와 숨이 막혀오는 현실감을 쓰고 싶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 사실 이 음악을 추가하려고 했지만 역시 음악 없이 집중해서 보시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제외했습니다.

https://youtu.be/X7U2ewsLzyM

역시 글과 잘 어울리긴 하네요ㅎㅎ 하지만 글이 잔잔한 부분도 있고 공허한 부분도 있고 그래서 그냥 빼버렸습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dhv7K7E5d8